박정희 시대에 경제성장 면에서 한국 경제가 빼어난 성적을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외적인 성공만은 아니었다. 동시대의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소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이 유사한 성장을 이룩했으며, 조금 앞서서는 일본이, 조금 뒤처져서는 중국이 또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것은 이 나라들에 공통적으로 작용한 역사적·환경적 요인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한 개인의 빼어난 지도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유종일, 「박정희의 맨얼굴」, 시사in북, 48p
오늘 이재용 삼성전화 부회장의 가석방이 결정되었다. 법무부는 장관의 말을 빌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제 상황과 사회 감정, (이재용 부회장의)수용 생활 태도를 반영했다1)”라며 가석방의 이유를 설명했다. 건국 이래 정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기업 총수가 형을 마치지 않고 출소를 하는 이유는 대동소이하다.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경제사범을 사회에 내보낸다.’ 조잡한 논리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이재용 부회장이 출소하는 것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사실상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삼성전자의 주주이거나, 아직도 한강의 기적을 신봉하는 사람뿐이다.
차라리 이재용 부회장의 수용 생활 태도가 뛰어났기 때문에 가석방을 결정했다는 말은 법 집행의 엄정함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상황과 사회 감정을 운운한 대목은 다소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출소하면, 대한민국이 경제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나? 아니면 코로나가 종식되나. 꿈같은 말이다. 우리는 유독 경제상황이 악화되면(97년 이후 경제호황이었던 적은 없지만) 경제사범들을 출소시켜왔다. 이 민연한 사정은 유독 대기업 총수에게만 국한된다. 농업상황이 좋지 않으면 농업종사자들을 출소시키고, 정치효능감이 떨어지면 선거사범들을 출소시키면 되는가.
박정희.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섰다는 달콤한 전설은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미 대한민국은 한 해의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률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 한강의 기적의 시대는 갔다. 한강이 아니라 호남의 영산강과 섬진강 영동과 영남의 낙동강까지 모두 더해도, 고공성장을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한 명의 박정희를 기다리는 듯하다. 오늘 이재용의 가석방 결정을 지켜보며, 나는 이 주장이 무리가 아님을 느낀다. 이런 조국의 틈바구니에서 택배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의 군 동기와, 1톤 트럭을 몰며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는 먼 동네 동생 녀석을 보며 먹물은 본디 할 말을 잃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30의 투기열풍을 지적한 언론이 떠오른다. 노동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통치 행위에는 침묵하는 사회의 목탁을 보며 먹물은 또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 이후의 대한민국 경제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다. 부디 가방끈이 짧은 나의 시기이며, 피해의식이며, 졸견이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란다.
1) 황희진 기자, 「이재용 13일 가석방…박범계 "코로나 장기화 경제, 사회 감정 등 반영"」, 『매일신문』, 2021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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